[문화산책] 생각에 대한 생각
생각이라는 낱말을 한자 말 ‘생각(生覺)’에서 온 것으로 알고 있는 사람이 뜻밖에 많은 것 같은데, 사실은 본디부터 우리 토박이말이었다. 학자들의 설명을 빌리면, 우리말의 깊은 뜻에 관심이 없던 시절, 한자와 한문에 얼까지 빼앗긴 사람들이 그렇게 적어서 착한 사람들을 속였고, 그런 시절에 학교를 다닌 사람들은 아직도 ‘생각’을 한자 말로 알고 있다는 것이다. 생각이라는 뜻에 가까운 한자로는 사(思), 상(想) 등이 있다. 사고(思考), 사색(思索), 사상(思想), 사유(思惟), 사변(思辨), 명상(冥想), 묵상(默想) 등 사(思)를 풀어보면 마음(心) 밭(田)이다. 우리 마음의 바탕을 말한다. 우리 겨레는 사람을 ‘몸’과 ‘마음’으로 이루어진 것으로 여겼다. 그리고, 사람의 속살인 마음은 ‘느낌’과 ‘생각’과 ‘뜻’의 세 겹으로 이루어져 있다고 여겼다. 그러니까, 생각은 마음의 한 겹인 것이다. 그러니 생각하면서 살아야 한다. ‘인간은 생각하는 갈대’라는 명언처럼, 하염없이 흔들리면서도 생각을 해야 하는 존재인 것이다. 그런데 지금은 생각이 사라져가는 시대다. 생각하기를 싫어하는 사람이 날이 갈수록 늘어가고 있다. 컴퓨터나 인공지능 같은 첨단 기계가 “생각 같은 골치 아픈 건 우리가 다 해드릴 테니, 편안하게 즐기시라!”고 끊임없이 속삭인다. 그처럼 달콤한 유혹을 뿌리칠 이유가 없다. 그러다 보니 “나는 생각하지 않는다, 고로 현대인이다”라고 선언하고 “나는 검색한다, 고로 존재한다”라고 스스로를 규정하기에 이르렀다. 용건은 되도록 짧고 삼빡하게 처리하고, 긴 글은 아예 읽지 않는다. 눈 아프고 골 때리는 책은 뭐하러 읽나, 편안하게 들으면 되지…. 간단히 검색만 하면 만사 해결인데 뭐하러 사색을 하며 궁상을 떠나? 글쎄? 정말 그런가? 생각은 마음의 한 갈래다. 따지고 보면, 생각은 인간에게 주어진 크나큰 축복이다. 머리 숙여 감사할 일이다. 영어의 ‘Think’라는 낱말이 한 글자 다른 ‘Thank’와 이웃사촌인 것도 의미심장하다. 마치 ‘Present’가 현재라는 뜻이면서 선물이라는 뜻인 것과 비슷하다. 이어령 선생은 생전의 마지막 인터뷰에서 젊은이들에게 꼭 하고 싶은 말은 무엇이냐는 질문에 “덮어놓고 살지 말라”라고 대답했다. 대충 살지 말고 생각하며 차근차근 소중하게 살아야 한다는 말씀이다. “덮어놓고 살지 말라”는 말씀은 예술가들에게도 그대로 적용된다. 작품을 열심히 하되 덮어놓고 하지 말고, 깊이 생각을 거듭하면서 그리고, 쓰고, 연주하고 그래야 마땅하다. 그래야 감상하는 사람도 깊게 생각을 하고 느끼고 감상할 수 있을 것이다. 그냥 보고 듣고 느끼면 된다는 말씀은 그만하시라. 물론, 작업 중에는 생각 따위가 거추장스러운 방해물로 여겨질 때도 있다. 작품에 열중하다 보면, 몰아의 경지에 빠져드는 순간이 있다. 말로 표현할 수 없는 귀하고 거룩한 경험이다. “뜻이 앞서면 뜻이 죽는다”는 판소리의 명언을 되새긴다. 그렇다고 해서, 생각이 필요 없다는 말은 결코 아니다. 그런데, 예술작업은 생각만으로 끝나지 않는다. 꼭 필요한 것이 한 가지 더 있다. 상상력이다. 손과 마음을 이어주는 상상력은 예술의 생명인 동시에 우리 인류의 미래를 건강하게 열어줄 원동력이기도 하다. 상상력과 창조력은 사람만이 가진 아름다운 힘이다. 기계가 대신할 수 없다. 유발 하라리는 “인간이라는 동물이 지구 위 최강자가 된 이유가 상상력과 그것을 전달하는 능력, 그를 통해 수만 수억의 개체를 한 방향으로 움직이게 하는 능력 덕분이었다”고 말했다. 그나저나, 생각하기조차 싫어하는 인간들이 자기 힘으로 멋진 상상의 세계를 펼쳐낼 수 있을까? 남이 해놓으면 마지못해 구경은 하겠지만…. 장소현 / 시인·극작가문화산책 생각 생각 따위 속살인 마음 우리 마음